요한복음6장47절-51절 “무엇을 바라고 믿는가?” 2020년 12월 18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오천 명을 먹인 일로 인해 수많은 인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기근과 가난을 해결할 길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이슈이기에 이것을 해결하는 사람이 있다면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설파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당장 먹고 배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닌 믿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게 오는 자’와 ‘나를 믿는 자’ 이야기는 먹고 사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약속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구약 광야에서 만나로 이스라엘을 먹이신 하나님처럼 예수님도 먹는 것으로 고통당하지 않게 해주실 것을 고대했던 당시 사람들의 심리에 배치되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너무도 잘 아셨기에 그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시기 위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란 말씀으로 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은 필요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믿고 신뢰하기 위함인 것을 강조하시면서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생’임을 다시 한 번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당장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산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을 떡을 먹는 이미지로 설명하시면서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듣기에 따라 오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떡’이란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시면서까지 사람들의 이해를 증진시키려 하셨습니다. 매일 먹는 떡을 통해 에너지를 얻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을 은유적으로 빗대어 영생하도록 살 수 있는 ‘떡’이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떡’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란 궁금증이 생깁니다. 주님은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신 예수님의 살을 먹으면 영생이 보장된다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물질적인 ‘떡’을 은유적인 ‘떡’으로 재해석하셨는데, 이번에도 물질적인 ‘살’을 은유적인 ‘살’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묘사한 것은 실제로 먹는 떡이 아님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살을 ‘내가 줄 떡’이라 한 것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를 믿는’ 행위를 ‘내 살을 먹는’ 행위로 실물화시켜 사람들의 이해를 도운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는다는 명백한 진리를 우리가 진정 원하는가를 스스로에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가란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늘 부딪히는 실제적인 이슈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좋은가란 것은 결국 실제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느냐란 현실 문제가 개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생’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란 것은 결국 우리가 왜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가란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됩니다. 먹고 배부를 수도 없는 ‘믿음’과 ‘영생’이라면 과연 추구할 가치가 있느냐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신앙을 항상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만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이 옳은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제부터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것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이기에 다르게 살 수 밖에 없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것을 얼마나 확실히 붙들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이제부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의 길을 걸을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