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6장41절-42절 “우리가 아는데” 2020년 12월 16일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것처럼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강력히 외치셨습니다. 만나가 광야의 유대인들에게 생명이었듯이 예수님도 그들에게 생명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41절을 보면,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라고 복음서 저자는 적고 있습니다. ‘수군거림’이란 ‘불평하다’는 뜻으로 예수님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입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주장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식량으로 오천 명을 먹인 사실로 인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군중들의 움직임을 잘 알기에 함부로 예수님을 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신체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들이 택한 방식은 예수님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고 하면서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고 비꼬았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드러내자 ‘요셉의 아들’로 맞받아쳤던 것입니다.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란 말로 요셉의 아들임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결정구를 날린 것입니다. 이같은 공격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기에 설득력이 있습니다. 요셉의 아들이란 사실과 그 부모를 알고 있다는 관계적인 증언은 주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등돌리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올 수 있느냐는 말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람에게서 태어났는데 신의 아들이라니 누가 받아들이겠느냐는 이 공격은 그 때만큼이나 지금도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심을 부정하는 근거로 요셉의 아들인 점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과 신의 아들은 엄연히 다른 영역으로 함께 섞일 수가 없다는 주장을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는데’란 상식적인 지식으로 예수님을 부정해버리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공격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 지식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또는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식량으로 오천 명을 먹인 사실이나 바다 위를 육지를 걷듯이 했다는 점도 과학과 상식의 관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상식과 과학에 맞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 모습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단순히 선한 선생 이미지로 포장해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은 마지막 날에 우리를 살리는 부활이기에 우리는 상식과 과학이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데’란 수준을 벗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에 근거해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재조명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뛰어넘어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을 때에 우리는 제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껏 자랑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