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경제 문제는 어느 시대이든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빈부 격차, 열악한 노동 현장, 임금 격차 등은 해결하기 어려운 화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도 이 주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해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사회 전체가 들썩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량으로 오천 명 이상을 먹였으니 당시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떡’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배부를 수 있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이야기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생명’을 ‘떡’이 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서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서로 절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떡’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다른 식으로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도 떡을 해결해야만 의미가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떡’을 주신다는 말에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4장에서 ‘생수’를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 물을 당장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던 사마리아 여인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입니다. ‘물’과 ‘떡’은 마시고 먹을 수 있는 실제적인 필수품이기에 사람들은 다른 쪽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을 익히 아셨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나는 생명의 떡”이라 하셨습니다. 먹는 ‘떡’이야기에서 인격적인 ‘떡’ 이야기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물질적인 ‘떡’에서 의인화된 ‘떡’ 이야기로 화제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구체적으로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란 말씀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하지만 ‘나는 생명의 떡으로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을 것’이란 말을 물질적으로 이해하면 결국 예수님에게 오는 자에게 날마다 먹을 수 있는 떡이 생긴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 아이의 음식으로 수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에게 오기만 하면 항상 배부를 수 있다는 약속일까요?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를 ‘나를 믿는 자’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를 주시려 하셨지만 이것도 예수님이 떡을 주신다는 믿음만 흔들리지 않으면 날마다 배부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사람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깊은 탄식이 지금은 없으실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이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면서 왜곡시키는 일들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것처럼 포장하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우리는 지금도 얼마든지 해결사로서 예수님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현실의 어려운 숙제를 대신 풀어주는 탁월한 능력자로서 예수님을 존중하지만 정작 그를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치는 헌신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도 깊은 탄식을 내뱉고 계신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변하지 않는 현실 중심의 사고 방식으로 십자가의 길이 훼손되는 모습에 예수님이 탄식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탄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응원을 받는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참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