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유대인들은 유일신론(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을 철저히 믿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지금과는 너무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이 팽배한 오늘날의 시각으로 유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각이 아닌 유대인의 시각으로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의 시각으로 읽을 때 그 의미가 더 와닿을 수가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란 질문을 유대인들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최대 관심사가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에 대해 모범적인 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이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모세 율법을 어릴 때부터 읽고 외우면서 자랐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정말 알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시험해보려는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 상태가 아니라 다른 그림으로 가득찬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넣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그려진 그림들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새로운 그림을 그려넣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그리려는 그림이 너무도 확실했기 때문에 주저없이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29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얼마나 확실한 답인가요! 모세의 율법이 아닌 ‘믿음’이란 답은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선명하게 와닿았을 것입니다. 율법과 너무도 다른 색깔인 ‘믿음’이기에 매우 신선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니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그들은 깊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해 율법은 ‘이것 저것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명쾌하게 선을 그어줍니다. 반면에 믿음은 관계적인 측면이 강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으로는 명확하지 않아 보입니다. 바로 이 지점을 예수님은 정확히 파악하시고 유대인들을 자신과의 관계 속으로 끌어당기신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의 답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전한 율법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했던 유대인에게 새로운 길이 제시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와 상관없이 언제나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분이시기에 그를 믿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철저히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믿음이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믿는 대상과 닮아가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그를 닮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더욱 더 신뢰하는 삶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정이 넘친다면 놀라운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