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6장27절 “영원한 가치” 2020년 12월 7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풍요로움이 행복의 필수 조건이냐에 대해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무조건 불행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이 살면 항상 행복할 것이란 가정도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 원합니다.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을 넘어 먹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만 일하지 않고 즐기면서 일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어찌보면 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를 성취하면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먹을 것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 산다면 다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한 것은 먹는 문제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가난과 질병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먹는 문제는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렇기에 한 아이의 음식으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은 열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계신다면 더 이상 먹을 것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식량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신 예수님을 놓친다면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할 일은 예수님을 찾아 곁에 두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사람들의 열망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꿰뚫고 계심에도 그것을 채워주는 일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먹고 배부른 경험을 예수님을 통해서 맛본 사람들에게 이 말은 너무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먹고 배부르게 하는 양식을 ‘썩을 양식’으로 보는 것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데 그것을 위해 일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썩을 양식’ 대신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이야기를 꺼내시면시 진짜 가치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썩을 양식’이란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시간과 기후, 장소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뜻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살라는 당부의 말씀은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습니다. 먹을 양식을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인데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예수님에게 오라고 하니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먹을 양식’이 아닙니다.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에서 알 수 있듯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질병을 고치고 양식을 제공해주시는 예수님에게 매료되어 다른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것임을 외치신 것입니다. 이 생명이 ‘영생하도록 있는 영생’입니다. 예수님만이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양식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위해 일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요구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야 이것을 위해 평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썩을 양식이 아닌 생명의 양식을 위해 삶과 죽음을 다 바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살 수 있는 영원한 가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