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6장10절-13절 “예수님이 계시기에” 2020년 12월 1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 38년된 병자를 치료하신 사건에 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은 당시 유대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오병이어’ 기적은 기근과 가난에 허덕이던 유대 사회에 회자되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제는 배불리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두 번 정도 이런 기적이 있었을 뿐임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기적이 아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른 목적을 갖고서 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가난한 군중을 위함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6절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군중을 먹일 수 있는 떡을 어디서 사겠느냐고 예수님이 물으셨다고 강조합니다. 빌립 하나만을 위함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를 염두에 두시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는 너무도 부족한 답을 내놓게 됩니다. 시험 점수로 보면 낙제점이었습니다. 형편없는 답변을 내놓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들을 삼삼오오 잔디밭에 앉도록 하신 후에 떡을 가져 축사하시는 예수님을 옆에서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겨우 보리떡 다섯 개에 불과한 것으로 각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만큼의 양을 제자들에게 나눠주게 하십니다. 이 때에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열심히 떡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뿐 아니라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이 원하는만큼 먹을 수 있게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어떤 감정에 휩싸였을까요? 제자들이 떡과 물고기를 사람들에게 배분해주었기에 지금 그들 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알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나눠줘도 떡과 물고기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오천 명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찰 정도로 풍성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이 가진 돈으로 이 사람들을 먹일만큼의 떡을 구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이 하나가 갖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결과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가득찰 정도로 식량이 남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보고 배운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만 따르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적어도 예수님은 우리처럼 먹을 것이 없어서 약해질 뿐 아니라 죄와 손잡는 분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요? 기근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더 냉혹해지고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요? 죄를 짓지 않고도 얼마든지 우리를 살려낼 수 있는 분임을 배웠을 것입니다. 불의와 손잡지 않고도 얼마든지 의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영원토록 의지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란 기대감이 커졌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모든 불의, 가난, 전쟁, 분열 속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영생의 소망을 품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정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예수님이 계시기에 언제나 새로운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