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입니다. 그가 베푼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몰려들었을 뿐 아니라 그가 전한 메시지가 아무리 날카로워도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3:7)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의 메시지를 달갑게 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를 ‘그리스도’(메시야)로 인정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요3:28)라고 반박을 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더욱 더 그를 추앙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했으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9)고 사람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역할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등불 비유로 요한의 사역을 평가하신 예수님은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요한을 좋아했고 따랐는지를 예수님도 인지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추운 겨울 한 낮에 따스한 햇빛을 쬐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묘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때’란 말로 요한의 역할이 제한적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등불이 밝히는 실체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의 증거는 철저히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맞추어진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요한을 따르던 이들이라면 메시야 예수님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유대인들은 요한을 추앙하면서도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찌보면 요한과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편가르기는 사람의 본능에 가까운 성향이라 누구에게든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면 요한의 편에 서거나 요한에게 마음이 상하면 예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릇된 태도에 연연하지 않고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36절,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란 말은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더 큰 증거’의 실체가 무엇이냐에 대해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라고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역사’란 무엇이냐에 대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나 38년된 병자를 완치시킨 사건 등으로 답할 수가 있지만 더 궁극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역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 속에 이식되는 일을 가리킵니다. 과연 어느 누가 이 일을 해낼 수가 있을까요? 그렇기에 예수님은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역사’가 무엇을 증언하느냐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보낸 유일한 메시야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주는 사역이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 안에 심겨질 때에 우리는 세상에서 그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 등불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