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이 유대 땅에서 활동하던 당시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과 동등한 예수님의 위치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로서 생명과 심판의 권한을 쥐고 이 땅에 오신 이스라엘의 메시야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예수님을 공경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만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음성을 들으라고 강력히 외치신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은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불신을 불식시키는 예수님의 화법입니다. 이 뿐 아니라 더욱 더 유대인들을 공황상태에 빠뜨리는 말씀을 예수님은 하십니다. 그것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자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이들(죽은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와 상관없이)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은 미래까지도 예수님의 지휘 아래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기에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뿐 아니라 죽은 이들도 먼 미래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말씀은 부활로 이어집니다. 미래 부활은 기정 사실이며 예수님이 이것을 역사 한 가운데서 실현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에 이미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에 일어난 일로서 현실화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미래 부활 또한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미래 부활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뉠 것입니다. 부활은 생명을 가진 이들에게든 심판을 받을 이들에게든 일어날 것입니다. 부활은 이 땅을 살다 죽은 모든 이들에게 일어날 미래의 사건입니다. 누가 생명의 부활 또는 심판의 부활로 살아날 것이냐에 대해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하는 자’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로 답을 하십니다. 미래의 부활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란 말씀과 ‘내 말을 듣고’ 등을 볼 때에 선과 악의 기준이 예수님의 음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생명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음성을 거절하고 살다가 죽은 이들이 맞이할 부활은 심판일 것이 확실해집니다.
미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이들로서 미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여 그것에 맞추어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이들은 미래부활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미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예수님의 음성일 것입니다. 미래 부활은 우리로 예수님의 음성을 더욱 진지하게 들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실제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미래 부활을 묵상한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더욱 실감날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삶을 예수님의 이야기로 채울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부활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먼 미래일지라도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에 비추어보면 미래 부활은 마치 코 앞에 다가온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미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소망하며 살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오늘도 듣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