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셔서 유대 땅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의 청중은 당연히 유대인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야훼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철칙은 ‘절대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친아들이라 칭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권한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상황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아들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신 것인데, 이것을 받아들이면 유일신앙(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이 무너진다고 유대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목숨 걸고 지키고 있는 십계명 중 제1계명이 무너지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예수님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음성을 유대인들에게 가감없이 들려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그의 음성을 들어야만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시면서 지금이 기회임을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은 곧 예수님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이 음성을 들을 때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메시지에 열광해야 했음에도 정반대로 예수님의 음성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들 앞에 놓인 생명의 길을 자기 발로 차버리는 어리석은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왜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답을 주셨습니다. 이 뿐 아니라 왜 그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나느냐에 대해서도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로 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임의대로 생명과 심판을 행사하시는 것이 아님을 유대인들에게 강력히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철저히 아버지와의 일치된 마음으로 살리는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준 십계명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유대인들은 다른 음성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불행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음성을 들었던 교회의 모습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과연 괜찮을까요? 예수님의 음성을 얼마나 자주 듣고 있을까요? 세상의 목소리에 파묻혀 사는 우리가 그의 음성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그의 음성을 진부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오래된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컴퓨터만 켜면 우리는 수많은 음성을 듣게 됩니다. 과연 그 음성들 속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의 가치를 반영하는 목소리는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다른 목소리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북해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입니다. 성경과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음성은 지금도 들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귀를 막고 있다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의 음성은 그냥 지나가는 기차 소리만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모든 목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을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지금 하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