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5장24절 “사망에서 생명으로” 2020년 11월 12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갑니다. 환자의 의사에 대한 신뢰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의사에 대한 신뢰가 클수록 환자는 심리적인 안정뿐 아니라 치료 과정을 성실히 따를 수 있습니다. 의사를 통해 병이 낫게 되면 의사에 대한 고마움이 저절로 표출됩니다. 완치된 환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를 치료한 의사를 조금도 의심없이 추천합니다. 이러한 선순환은 환자와 의사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일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신성모독이라는 당시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웁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놓은 신성모독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도 매우 나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과 사회적인 반감을 온 몸으로 느끼시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자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친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임을 더욱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것을 신성모독이란 죄목으로 덮어씌워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든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친아들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음을 천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생명과 심판을 주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셨듯이 자신도 동일한 권한을 갖고 있음을 전하셨습니다. 아무리 유대 사회가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통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외치신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볼 때, 본문이 말하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느낌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믿지 못하도록 신성모독죄를 덮어씌웠는데 예수님은 ‘내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시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요? 적대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청중에게 ‘나를 믿으라’고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 말을 들으라’고 사람들에게 외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적개심과 사회적인 반감이란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외치신 것처럼 지금도 이 메시지는 울려퍼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적대적일수록 영생의 메시지는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확증하셨듯이 지금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반감과 사람들의 무관심 내지 적대심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로 심판이 아닌 영생에 이르게 하며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판과 영생, 사망과 생명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눈 앞에 닥친 세상의 수많은 일에 파묻혀 사는 우리가 이것을 놓치고 살기가 너무도 쉽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희노애락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살지만 우리는 심판이 아닌 영생을,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사회의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은 자로서,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세상에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방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