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할 사항으로 ‘자기 생각 주입하기’가 있습니다. 지금의 관점을 성경에 주입하면 왜곡될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성경 당시에는 커다란 이슈가 되는 사건을 대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유대인의 안식일 준수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본문의 유대인들은 너무도 이상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 됩니다. 38년된 병자가 기적적으로 완치가 되었는데, 그 날이 안식일이란 이유로 정죄하는 것을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떻게 병 나은 것을 안식일이란 이유로 금지할 수 있느냐고 분개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우리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유대인의 행동은 기괴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 준수를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는 방법을 찾기 위해 수십 가지로 세분해서 지켰습니다. 그 중에 하나에 걸리는 것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행위입니다. 유대인들은 억지를 쓰거나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 안식일 준수란 십계명을 지키려는 거룩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비난을 들었던 환자는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고 변명 비슷하게 답변합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을 낫게 해 준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란 최선의 방어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 환자도 당시 유대인들의 안식일 준수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추궁을 듣고 분개한 것이 아니라 나름 합당한 핑계를 댈 수 밖에 없었던 처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생일대의 행운을 거머쥔 사람이 되었지만 당시 안식일 준수란 커다란 율법 앞에서 무기력해진 모습입니다. 아무리 기쁜 소식을 손에 쥐고 있어도 그것을 법을 어긴 범법 행위로 정죄하니 다른 사람을 핑계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침 받은 환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단지 누군가 낫게 해줘서 일어나 걸어다니고 있을 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끈질기게 추궁합니다.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고침 받은 사람은 이번에는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낫게 해 준 사람이 누군인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있는데,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 이렇듯이 옳고 그름의 틀에 갇히면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환자는 ‘내가 나았다’고 외치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옳으냐’로 비난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그가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이냐고 따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은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은혜 받은 사람을 추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기준으로 은혜를 평가하기에 이런 일들이 자주 발생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해석해야 하는데, 은혜와 반대되는 기준으로 해석하면 은혜의 생명은 사라지게 됩니다. 본문의 환자가 은혜로 치료되었는데, 안식일 준수란 기준으로 재단해버리니 범법자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은혜를 무엇이 옳으냐란 윤리 기준으로 평가하면 은혜는 힘을 쓸 수가 없게 됩니다. 은혜는 받는 사람의 행위가 아닌 주는 이의 긍휼과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고침 받은 환자가 말한,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란 답변은 은혜를 대변하는 최선의 방어입니다. 은혜를 행위로 비난할 때 은혜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나를 낫게 해 준 그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베푼 주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주신 분이 다 하셨으니 주님만을 내세울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옳으냐를 넘어서는 은혜의 위대함을 우리는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