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5장1절-4절 “미신에 사로잡히면” 11/2/2020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간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가난과 질병은 시대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 둘 중 하나에 걸리면 마음이 약해질 뿐 아니라 저항할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최근 폐암 말기 환자인 어떤 연예인이 8개월 동안 먹었던 약을 절대 다른 이들은 복용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약을 먹었지만 암이 악화되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몸이 약해지면 건강할 때에는 절대 듣지 않았을 소문들에 민감해집니다. 어떤 것이 몸에 좋다는 소문을 들으면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시도하게 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이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연못 주변에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당시 의학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앓고 있던 이들이 하염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것은 4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는 소문 때문입니다. 너무도 강력한 소문입니다.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예루살렘 주변 사회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라고 합니다. 성전에 들어가 거룩한 제사를 드려야 되는 절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병자들은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성전보다 연못을 더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어떤 질병도 낫게 해주는 연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미신이냐 아니냐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질병을 낫게만 해준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 옆에 있는 연못이 가장 신성한 곳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신성함을 더욱 강화시키는데 천사에 대한 확인되지 않는 소문이 큰 역할을 합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한다는 소문은 미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미신은 절대 금기시하는 일입니다. 연못에 몸을 담그면 낫는다는 것을 미신이라 하면 그 일을 할 수가 없기에 ‘천사’까지 동원되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고 포장한 것입니다. 미신에 거룩한 옷을 입힌 것입니다.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절박감을 안고 베데스다 연못을 찾는 수많은 병자에게 이 장소는 신성함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물의 움직임이 있을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간 자는 반드시 낫는다는 것이 사실이냐를 본문은 따지지 않습니다. 당시 퍼져있던 소문을 있는 그대로 진술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이 성전 바로 옆에서 벌어진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 보다는 치료 효과가 있다는 연못을 더 소중히 여기는 모습은 정죄나 비난 보다 서글픔을 자아냅니다. 우리가 약해지면 과연 성전보다 연못을 더 소중히 여기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치료가 일어나지 않아도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기보다 조금이라도 효과를 본다면 그것이 미신이라도 해보자는 심리를 과연 우리가 이겨낼 수 있을까요? 미신에 사로잡히는 것은 우리가 약할 때 더욱 강력해집니다. 약함은 하나의 약점이 되고 그것을 파고들어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신앙 자세보다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정도를 걷기 보다 미신이라도 우리 삶에 유익하다면 손을 잡고 싶어집니다. 목숨보다 더 귀한 예수님이라 고백하지만 실제로 목숨이 걸리게 되면 우리는 한없이 약해집니다. 따라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신앙 고백이 우리 삶 속으로 깊이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이런 훈련이 있어야 우리는 곁 길로 빠지지 않고 주님이 만들어놓으신 신앙의 길로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