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생명은 ‘영생’과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냐에 대한 답이 필요합니다. 멸망과 심판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멸망과 심판 아래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받아야만 세상은 구원을 실제로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3:17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우리에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어야만 우리는 심판을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심판할 권한이 없다면 생명을 주는 것은 공허한 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심판할 권한과 생명을 주는 권한은 마치 쌍둥이와 같습니다. 본문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란 말씀은 예수님이 심판할 권한까지도 쥐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심판할 권한을 예수님이 쥐고 계시기에 생명도 또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고, 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을 뿐 아니라 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도 강렬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이 아닌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심판할 권한을 갖고 계셨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생명과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생명의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심판받아야 할 세상이지만 생명을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예수님이 세상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이식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일이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났음을 복음서 저자는 “아버지께서…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과 생명을 예수님이 다 쥐고 계심을 아는 일이 왜 이리 중요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 저자는 23절에서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등한 대우를 예수님이 받으셔야 하기에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쥐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세상이 예수님을 공경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이식받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을 공경하는 삶의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허망한 주장일 뿐입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정확히 같습니다. 이것을 허물어 뜨리는 주장들은 모두 다 거짓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고 자신있게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합당한 태도입니다.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믿거나 공경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확인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아들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는 태도는 물러설 수 없는 신앙적 자세입니다. 아들을 하나님처럼 공경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대우하는 일이 신앙의 참과 거짓을 가르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