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됩니다. 조금의 희망이라도 보이면 그것을 붙들려 합니다. 특별히 자식의 생명이 걸린 일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게 되었는데 무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대, 문화를 넘어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부모의 간절함은 거의 비슷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는 이런 심정으로 예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의 사회적인 신분은 상당히 높습니다. 권력과 부를 동시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소에 그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손을 댈 수 없는 일을 만나고 맙니다. 자식이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백방으로 손을 써가며 치료하려 했을 것입니다.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47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는 상황에서 그는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의 간절함은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와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란 거듭된 간청에 잘 묻어나 있습니다.
그의 간절함과 달리 예수님의 태도는 무심한 듯 보입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란 아이의 아버지의 간청 다음에 나오는데, 이것은 너무 냉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십니다. ‘내려오소서’란 간청에 ‘너 혼자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이의 아버지가 느꼈을 감정이 어떠했을까요? 이 순간 가장 고민할 사람은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아들이 있는 집으로 가고 싶은데 그냥 ‘가라’고 하면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니 무척 난감한 상황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혼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본문 저자는 의도적으로 “믿고”란 단어를 ‘가더니’ 앞에 놓았습니다. ‘믿고’란 단어가 없었다면 다른 상상을 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갔다거나 ‘실망과 분노를 억누르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다른 상상을 가미하지 못하게 액면 그대로 그가 ‘믿고’ 갔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 달리 이 사람은 ‘믿고’ 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오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의 믿음을 밖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믿고’ 내려가는 길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자기 종들을 만나 희소식을 듣습니다. 아이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아이의 아버지가 보인 색다른 반응에 주목합니다. 그냥 기뻐서 재빨리 아이에게 달려가 확인할 수 있었을텐데 그는 ‘그 낫기 시작한 때’를 확인합니다. 낫게 된 시간을 듣고 나서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아 있다’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함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그의 꼼꼼한 성격을 반영한 것이 아닙니다. 의심이 많아서 무엇이든 확인하고픈 그의 기질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는 놀라운 반응입니다. 50절의 ‘믿고 가더니’에 이어 53절의 ‘다 믿으니라’는 반응은 저자가 본 사건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홀로 집으로 내려갈 수 있었던 믿음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현장을 목격하면서 또 다른 믿음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일관된 태도가 믿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적의 수단으로서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야 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더 주님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