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4장20-22 “예배의 장소” 10/15/20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 남성으로 여겼다가 이제는 ‘선지자’로 보게 됩니다. 이렇게 시각이 바뀌게 된 과정에서도 여인은 여전히 예수님의 진정한 실체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의 치부까지 드러난 상황에서도 여인은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오래된 종교 논쟁을 끄집어냅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말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쪽이 맞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전제를 갖고 말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다른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자신을 방어했습니다. 지금 여인은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 정당성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오랜 역사적 전통 속에서 ‘이 산’ 곧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자꾸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할 곳은 예루살렘에 있다’고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너무 편협하고 옹졸하다는 뉘앙스입니다.

구약을 보면,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은 북쪽과 남쪽으로 분열합니다. 북쪽은 여로보암이 통치를 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 마음을 빼앗길까봐 노심초사합니다(왕상12:27). 그가 강구한 방안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 다음에 백성에게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왕상12:28)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북쪽에 있던 이스라엘인들은 벧엘에 쌓은 제단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마리안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게 된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를 참된 예배로 정당화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당시 분위기를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십니다.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제3의 장소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의 장소를 물리적인 위치로 규정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배할 때’란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예배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당시 양 진영을 다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지만 ‘내 말을 믿으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새로운 기준이심을 여인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시면서도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란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유대인을 통해 구원을 펼치심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구약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한 예배를 받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심산에서 산당을 짓고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전혀 없었던 우상 숭배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며 새로운 형태의 예배가 열릴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제는 특정 장소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장소에서 예배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라면 장소에 연연하지 않아도 됩니다. 특정한 장소에서 예배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특정한 장소를 신성시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이후로 예배는 장소가 아닌 예수님이란 인격을 통해서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이라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장소가 아닌 예수님을 붙들고 그의 인격에 의존해서 예배드려야 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