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 이야기를 하신 후 좀 더 본질적인 대화로 이어집니다. 여인은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란 사회,정치,역사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이슈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생수’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의 물인데 그것을 여인에게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10절에서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신 후 14절에서 “내가 주는 물”이란 말로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여인은 전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수’를 지금 자신이 우물에서 퍼올린 물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11절에서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여기 있는 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도움을 구하면서 엉뚱하게 ‘생수’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핀잔을 준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기죽이기 위해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자신 앞에 있는 유대인 남성이 야곱보다 더 위대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질문한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하기에 어떻게든 이기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냐’란 질문은 사실 너무도 중요한 신학적인 이슈입니다. 여인이 그것을 의식했든 아니든 상관 없이 이 질문 자체는 구약과 예수님의 관계를 묻는 상당히 예민한 주제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 비슷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들이 나와도 어떤 이스라엘인도 야곱의 후손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야곱보다 크냐’고 물었으니 자기 앞에 있는 유대인 남성도 야곱보다 더 클 수 없을 것이란 판단을 여인이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인 답변 대신에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는 묵직한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나온 물과 예수님이 주신 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쐐기를 박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계속해서 마실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한 번만 마시면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 물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실제 우물에서 얻을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주셔야만 하는 물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물을 마시듯이 예수님이 주신 물을 마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자가 1:12에서 말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3:16에서 말하는 ‘영생’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이 곧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입니다. 영생이 생수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적인 사물로 이미지화되면서 피부에 와닿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데, 우리 속에서 예수님이 영원토록 거하시면서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하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주는 물’이란 곧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이 물을 마시는 것이며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토록 생명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야곱보다 더 크냐’에서 ‘야곱’의 자리에 다른 무엇을 대입시킨다해도 우리는 항상 예수님만이 가장 위대하시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