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로 수가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은 전도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누군가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례들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전도가 얼마나 귀중한 사역인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좀 더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전도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 이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이틀 동안 그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이 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41절,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는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음을 보여줍니다. 저자의 관심은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모습에 있습니다. 물론 오직 설교만 하셨다고 추정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든지 병자를 고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하심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의 결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이들이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도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에 비해 직접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입니다.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마을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보인 반응을 저자는 의도적으로 기록합니다. 그냥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이들도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믿게 된 이들도 있다는 식으로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저자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42절,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라고 시작합니다. 여인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예수님을 전해줘서 고맙다고 하면 될 일을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것은 여인의 전도가 뭔가 잘못된 것인양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입니다. ‘네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일까요? 영어 성경을 보면,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단지 네가 말해준 것 때문만은 아니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전도가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제는 그것을 능가하는 뭔가를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한 마을 사람들에게서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이 전한 메시야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이제는 ‘친히 듣고 아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란 사실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전도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에서 출발하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체험하면서 더 깊은 신앙을 갖게 된 모습입니다. 기존에 갖고 있던 신앙을 더 확고히 다지는 모습입니다. 여인의 전도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예수님을 알아가는 올바른 신앙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인이 말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에서 이제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다’로 전환되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누군가의 소개로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일어나야 할 변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친히 듣고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확실히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신앙이 더 깊이 새겨진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언어로 ‘예수님은 진짜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할 때 우리의 신앙은 확고히 다져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흔들만한 일들을 만나도 이렇게 다져진 신앙을 갖고 있다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진정 믿고 확신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