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3장9절-12절 “불신” 9/28/2020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신뢰하던 사람을 어느 순간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뢰가 무너지고 의심이 들면서 속은 느낌에 분노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적인 불신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성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이유를 정리할 틈도 없이 감정이 앞서면서 상대를 비난하게 됩니다. 상대를 믿지 못하는 것은 많은 경우 이렇게 감정이 개입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는 어느 정도 감정이 개입된 불신을 표출합니다. 그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란 반문은 매우 격양된 상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매우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변 시선을 이겨내고 예수님을 찾아올 정도로 신뢰가 컸습니다. 그러나 ‘거듭남’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는 당황했습니다.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말도 안되는 주장을 예수님이 펼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정에 불을 지피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성령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니고데모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구약 전문가로서 성령에 대한 그의 이해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예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정을 실어서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신뢰에서 불신으로 태도를 바꾼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매우 차분한 대응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이것은 듣기에 따라서는 감정을 더욱 상하게 만드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의 상식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주장들이 하나같이 비상식으로 들리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것도 모르느냐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불신에다 자존심 상함까지 더해지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이면 감정을 달래주고 니고데모가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줄 수도 있을텐데 예수님은 직진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적절한 대응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니고데모는 본문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19:39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인생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둔 것은 틀림없습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불신이 교차하면서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신뢰했다가 어느 순간 불신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가 무슨 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다가 무슨 사건으로 인해 그것이 산산조각 깨지기도 합니다. 니고데모의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따지듯이 우리의 감정이 격해지면 ‘주님 어찌 나에게 이렇게 야박할 수 있느냐’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신뢰는 한 순간에 불신으로 뒤바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함부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치 쉽게 찢어지는 종이처럼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인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를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땅의 일만 믿을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일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늘의 일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을 활짝 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상식과 자존심은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은 무조건 맞다는 신뢰를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불신으로 끝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는 가운데 부딪칠 수 있는 수많은 불신의 장벽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불신이 끝이 아니라 더 깊은 신뢰로 가기 위한 하나의 관문 정도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를 견고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