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을 ‘말씀’ 또는 ‘아들’로 지칭합니다. ‘말씀’은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 나옵니다. ‘아들’은 1:14, “아버지의 독생자”에서 처음 나옵니다. 저자는 3:35-36에서 ‘아들’이란 칭호를 두드러지게 강조합니다. 이 호칭은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를 위해 사용됩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는 하나 뿐인 특별한 존재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 뿐 아니라 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두 개의 이질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들 안에서 세상을 사랑하신 특별한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세상 사랑은 아들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이 사랑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들 없는 세상은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유별난 사랑이 세상에도 사랑으로 표출됩니다. 이것이 요한이 전하고자 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들을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아들을 통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서 저자는 36절에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라 쓴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에 제공한 ‘영생’은 철저히 아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믿음’과 ‘순종하지 않음’을 대조시킨 점입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일텐데, 믿음을 순종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하나의 관문 또는 티켓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오해한 나머지 아들을 수단으로 만들고 영생을 목표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것은 아들을 순종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영생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영생은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과정을 다 포괄하는 넓은 의미입니다. 고난, 질병, 죽음도 영생 앞에서는 무기력해집니다. 그 영생이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고 우리가 그 아들을 믿고 순종하면서 누리게 됩니다.
아들을 믿느냐 마느냐는 것은 영생이 달린 중차대한 이슈입니다. 한 쪽은 영생이 있고, 다른 쪽은 영생을 보지 못합니다. 영생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알리기 위해 저자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덧붙입니다. 영생 없는 길은 하나님의 진노가 마치 구름처럼 항상 그 머리 위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두 개의 길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지를 묻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두 개의 길을 비교해 보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영생이 있는 길과 진노가 머무는 길을 비교해 보면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비교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이 비교는 지금의 삶이 결코 불행하거나 절망적일 수 없으며 항상 소망이 넘치는 길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 안에서 거두어져 이제는 영생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보는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서 우리는 질병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드리워진 어둠의 그늘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 거둬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