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시14:2; 33:13)란 문구가 자주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인 하늘과는 다른 영역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대표적인 단어가 ‘하늘’입니다. 이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자신을 ‘인자’라 칭하시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임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셨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6:62에서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라 하시면서 이것을 밝히신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 있던 곳’이란 요한복음1:1이 말하듯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곳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늘’은 이렇듯이 철저히 하나님이 완벽히 통치하시는 영역입니다. 이처럼 그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인자’란 요한복음1:14이 보여주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가 이제는 하늘에 올라간 자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확실히 밝히십니다. 이것은 나중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올라가신 하늘 이야기에서 완성이 됩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하늘에 올라간 자’는 오직 예수님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던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니고데모가 말한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51에서 밝히셨듯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늘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현대 종교와 철학이 주장하는 하늘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예수님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하늘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한 가지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이 말하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가 그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나무에 달려 죽으셔야함을 말합니다. 복음서의 저자가 이것을 기록할 당시에는 예수님은 이미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우리는 십자가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늘의 이야기를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인자의 들림’이란 시각을 배제한채 우리는 절대로 하늘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하늘을 이해하면 오해와 왜곡이 무성해질 뿐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해야 이 땅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은 민수기21:6-9의 사건을 언급한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려 죽어나갈 때 장대 위에 걸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해도 살아났던 장면입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인자의 들림도 생명을 주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집니다. 그렇기에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본문15절이 강력히 외친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통해 땅에 임한 하늘 이야기가 생명의 이야기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과 땅을 이으신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