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3장 34절-35절 “아버지와 아들” 10/6/2020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가장 친밀합니다. 하지만 친밀함의 정도 차이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기에 친밀함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상처를 받으면 친밀함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의 문을 닫은채 형식적인 관계로만 지내기도 합니다. 가장 친밀한 부모와 자녀 사이일지라도 얼마든지 상처로 인해 관계가 깨질 수 있다면 다른 관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인간 관계는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각으로 모든 관계를 이해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에 근거해서 판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는 우리의 이러한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편협하고 좁은 시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접근하면 잃을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해할 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 두 분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 두 분의 관계가 신뢰와 순종으로 얼마나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감성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저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를 통해 이 두 분을 부자 관계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 사회의 가족 개념을 반영한 것입니다. 부자 관계가 유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유대인들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시대와 사회에 따라 가족 개념이 달라질 수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에는 당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유대 사회란 렌즈를 통해 성경을 이해한다면 훨씬 더 의미가 와닿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사랑’이란 단어로 이 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아들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아닌 아버지의 아들 사랑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너무도 아름답고 멋진 말이지만 얼마든지 오염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아들 사랑도 오염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 사랑은 조금도 오염된 흔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십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완벽히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이것을 저자는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아들 손에 다 맡기실 수 있을 정도로 아들을 완벽히 신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완벽한 신뢰를 받은 아들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34절,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완벽한 신뢰에 대한 보답은 완벽한 순종입니다.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완벽히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는 말은 열 마디 중 두 세마디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영한다는 뜻입니다. 어찌 이 일이 가능할까요?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실텐데 어떻게 이처럼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실천할 수가 있을까요? 저자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란 말로 답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예수님이 완벽히 하나로서 움직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제한 없이 주심으로 인간 육체의 연약함을 안고 살아가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히 실행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신뢰와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은 모든 신앙인에게 풍성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신뢰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얼마나 순종으로 화답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순종이 우리 삶의 여러 방해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더 풍성한 순종의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