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빛이 비치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빛이 없으면 어둠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렇듯이 빛과 어둠은 동시에 한 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어둠이 빛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어둠인 세상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계속해서 세상에 나타내고 계시지만 세상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빛을 거부하는 어둠의 모습입니다. 어둠인 세상은 이렇듯이 계속해서 빛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빛은 계속해서 어둠에 비추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둠은 자신을 비추는 빛을 마주합니다. 거절할수록 빛은 더욱 강렬히 어둠에 다가옵니다. 빛이 그 일을 감당하기 전에 그 빛을 드러내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존재 이유인 동시에 사명입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선택이 아닙니다. 본문 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보내심’이란 말은 하나님의 선택임을 드러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된 사람입니다. 그는 그 일을 가장 충성스럽게 해낸 사람입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그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빛이라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임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빛이 대하여 증언하러 온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이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의 저자는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어둠에 갇혀 있는 모든 사람이 빛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일을 세례 요한이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빛을 증언하는 궁극적인 사명입니다. 증언을 듣는 이들이 빛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하면 매우 이상한 장면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빛을 증언했는데 증언자를 추종하는 장면입니다. 빛을 깨닫지 않고 증언자의 말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증언자로 인해 빛이 가려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증언자의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증언자임을 세 번이나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저자는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로 온 자”임을 언급하면서 빛이 아닌 증언자로서 세례 요한이 자신의 일을 잘 감당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깨닫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 세례 요한은 사력을 다합니다. 그의 증언을 듣는 모든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빛을 믿게 하려 한다는 저자의 강조는 이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로 말미암아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받아들여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요한의 사명은 그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빛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빛을 받아들인 사람이 된 이후로 그 빛을 다른 이에게 증언하는 사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따라서 빛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빛의 증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란 말을 이런 각도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개인 뿐 아니라 교회도 빛의 증언자로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교회는 그 자체를 빛내기 위해 일하면 안됩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빛의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도 빛의 증언자로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