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벗어나 광야 생활로 접어들었을 때 불기둥과 구름 기둥은 보호막 뿐 아니라 안내 역할을 했습니다. 더위와 추위로부터 보호할 뿐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아끼고 사랑하셨는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이스라엘 백성의 눈 앞에서 펼쳐집니다. 그것은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얼마나 강력히 영광이 임했던지 모세조차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광경을 출애굽 저자는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40:35)라고 묘사합니다. 눈으로 본 광경이 얼마나 장엄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예수님의 오심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오심을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로 설명합니다. ‘거하심’이란 집을 짓고 그 곳에 사시는 것을 뜻합니다. 모세 시대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으로 말하면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강력히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란 말은 아주 강력합니다. 이것은 눈으로 확인한 사실임을 증언한 것입니다. 이것을 저자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덧붙이면서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예수님보다 반 년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이 ‘나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그를 소개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우리가 보니’와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증언하는 이 장면은 독자에게 신뢰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실제 목격했던 그의 제자들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포함하는 놀라운 단어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제자들처럼 ‘우리가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것인데 저자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곧바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성막 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에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성막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와 달리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은 어떤 흠이 있는 존재라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마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까지도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은혜와 진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점검할 때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것이 하나도 귀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