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저는 어린 시절에 가끔씩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 전쟁 시기에 공산당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신 조부모 이야기, 네 살의 나이에 고아가 된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훨씬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란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지나간 과거는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대한 바른 관점을 갖고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일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어떤 목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을 기술하는지에 대한 시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것은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에 대한 저자의 말입니다. 이것을 기록할 당시에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상태입니다. 그분을 믿고 생명을 얻은 사도 요한은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은 존재가 되었기에 그분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될 뿐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자신있게 그분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됨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확인한 요한입니다. 그는 이 생명을 모든 이들이 갖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책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시간이 시작되기 전 이야기와 연결시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란 시작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태초에 이미 존재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에 있습니다. 만물의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자신있게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생명이 만물 생성에 결정적인 것일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절대적입니다. 요한은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면서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빛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듯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에게 있어야 함을 강력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빛처럼 사람들에게 왔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을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을 살리는데 이것을 거절하는 불행이 세상을 뒤덮고 있음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지금도 예수님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이 지금도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체험했다면 요한처럼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생명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의 생명을 세상에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생명만이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자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