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장7절-8절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면” 2021년 4월 21일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안전한 장소가 한순간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변할 수가 있습니다. 항상 다니던 길에서 강도를 만나게 되면 그 길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안전이 보장되기 전까지는 그 길을 가급적 피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유대 지역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닌 가장 위험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0장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 했던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신성모독 죄목으로 사형에 해당되는 처벌을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요단 강 저편으로 이동해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이는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유대로 가자는 말에 기겁을 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들이 얼마나 놀랬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지금 유대로 가는 것은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가장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모르고서 예수님이 유대로 들어가려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보였던 걱정과 두려움이 예수님에게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위험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서 예수님이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유대로 들어가려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제자들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을 정도로 파격적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유대로 다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제자들의 뇌리속에 각인이 되어 후에 그들의 행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위험한 곳인줄 뻔히 앎에도 개의치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 제자들이 예수님의 담대한 행동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지역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이렇듯이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귀한 자산이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일신상의 안녕과 평안을 추구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게 하는 선한 영향력을 예수님이 끼치신 것입니다. 물론 복음을 들고 위험한 지역을 다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 구태여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환영받지 못하는 지역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느냐고 볼멘 소리를 내는 이들의 비판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안전 지역만을 골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행동에 반하는 더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세상이 모두 다 알아주고 인정하는 선에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때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지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환영받지 못한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은 기독교인들의 이야기가 과연 헛된 일일까요? 무모하게 행동하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일까요? 기독교가 새로운 지역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에는 언제나 커다란 위험을 무릎쓰고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미리 알아보면서 할 수 있는 그런 사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세상 속에 전하는 일은 개인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행해야 하는 매우 용기 있는 사역입니다. 이 사역에 삶 전체를 던진 이들이 있기에 복음은 지금도 세상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데 구태여 지금 그 곳에 가려 하느냐는 반대의 목소리가 있어도 복음을 들고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엄청난 영적 파워입니다. 우리는 과연 복음을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