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장5절-6절 “당장 움직이지 않아도” 2021년 4월 20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아픈 사람을 방문하고 위로하는 것은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물론 삶이 너무 바빠 당장 찾아가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급적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유는 아플 때 위로만큼 더 힘이 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격언처럼 고통의 무게를 나눠지는 일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좀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가장 빨리 움직이실 것 같은 예수님이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란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 느긋하게 행동하십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란 대목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이틀이란 시간을 지체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중한 병에 걸린 그를 찾아가는 일에는 의도적으로 이틀을 미루셨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평소 매우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 중한 병에 걸렸는데 오히려 이틀이나 늦게 움직이시다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뭔가 바쁜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신 대목입니다. 또한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이틀을 더 지체하신 이유를 짐작케 하는 중요한 단서들입니다. 당장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가 예수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이틀을 더 지체하신 것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냈는데, 아무 소식도 없을 뿐더러 이틀을 더 지체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면 실망감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장 움직여도 늦을 판인데 이렇게까지 의도적으로 늦추다니 혹시 나사로가 죽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 그 누이들의 원망이 얼마나 대단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체된 사이에 그가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실제로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서운한 마음을 표출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예수님은 미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렸음에도 방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셨기에 예수님은 그렇게 행동하셨지만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즉각 움직이지 않으신 예수님이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이들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이런 긴장감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에게 너무도 긴급한 도움을 요청했지만 전혀 서두르지 않으시고 지체하는 것만 같을 때에 우리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해결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그 어떤 어려운 일도 해결될 것을 믿기에 빨리 도와주시기를 우리는 원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서두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가 있습니다. 더 큰 절망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런 위기 속에서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키우려 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이를 계기로 한 단계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죽을 것같이 힘들어도 우리는 당장 움직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합니다. 어떤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란 믿음을 갖고 견뎌야 합니다. 이런 신뢰가 쌓일 때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주님의 깊고도 오묘한 뜻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