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며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아픔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사람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의심하게 되고 깊은 우정을 나누기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아픈 경험을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이들을 한없이 품으실 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을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란 말로 나타내셨습니다. ‘문’이란 안으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오는 출입문인데,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문’에 비유하면서 그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데, 그 문을 출입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동행을 뜻합니다. 이것은 ‘문’을 단순히 안으로 들어가는 절차 정도로 여겨서는 안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란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이제부터 모든 여정이 그가 없이는 무의미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는 말과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부연설명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왜곡된 시각을 교정시켜 줍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을 천국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이런 시각이 위험한 이유는 예수님이 곧 천국 자체임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은 천국 입성을 위한 관문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연합을 배우고 훈련하고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란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천국 합격을 위한 시험 문제로만 여기면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시험을 잘 치르고 좋은 점수를 얻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이 어떻게 펼쳐질 지를 기대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란 문을 통과한 자로서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이 무엇인지,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지를 이제부터 배우고 익히고 훈련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온 그동안의 삶과 비교해서 얼마나 다를지를 기대하라는 놀라운 축복이 내포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생명이 무엇이며, 그것을 더 풍성히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 축복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냐면 예수님이란 문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자로서 평생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살게 되었으니 다른 어떤 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란 말을 용기있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의 생명을 얻었고 그 안에서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부터 누구를 위해 살 것인지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고 예수님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허울좋은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란 문을 통과한 사람은 매순간마다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날이든 불행한 날이든 우리는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예수님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진정 그 축복을 누린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또한 더 풍성한 구원을 누릴 것임을 기대하며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