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자녀를 야단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의 말을 잘 알아듣고 잘못을 고치는 자녀라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삐뚤어진 친구들을 가까이 하면서 부모를 멀리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말을 잔소리로 깎아내리고 그릇된 친구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녀를 볼 때에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지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양으로서 반드시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양은 절도와 강도의 음성을 들으면 안됩니다. 오직 양의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실제로 목축 사회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와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란 예수님의 묘사는 너무도 정확한 표현입니다. 또한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는 양의 태도도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이 비유가 지향하는 바는 양은 반드시 자기들의 목자의 음성만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목소리에 현혹되면 마치 강도와 절도를 만난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기에 그런 불행을 모면하는 최고의 방법은 목자의 음성에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묘사하신 후에 “나는 양의 문”이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양이 반드시 출입해야 하는 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에 들어갈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 하셨으니 그를 통하지 않고는 문을 통과할 방법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양이라 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인데,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 우리에 들어갔다는 것은 양이 아닌 강도 또는 절도인 것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양의 무리 속에 섞여 있는 강도와 절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양의 탈을 쓰고 얼마든지 양들 속에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단언적인 표현으로 강도와 절도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어떤 음성도 듣지 않아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예수님과 그의 양들의 특별한 관계 속을 비집고 들어가 포획하려는 불순한 세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절대 안전할 것 같은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예수님은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만 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다른 음성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유혹들이 우리 귀에 들릴 때 그것을 뿌리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영혼을 훔치려는 거짓된 말들에 속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진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절도와 강도의 음성을 듣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가르침이 부모의 잔소리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좋은 음식이라도 배부른 자에게는 부담이듯이 주의 귀한 말씀들이 영적으로 배부른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항상 새롭게 들을 수 있기 위해 마음 자세를 자주 점검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쌓일 때 우리는 영혼을 헤치는 강도와 절도의 음성에 현혹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으며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