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0장37절-39절 “안타까운 심정으로” 2021년 4월14일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자식이 엇나갈 때 부모로서 느끼는 절망감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런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보지만 그릇된 길에서 돌아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절망감은 더욱 깊어집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런 심정으로 유대인들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란 놀라운 주장을 서슴없이 하신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할 뿐 아니라 돌로 치려는 그들의 과격한 자세를 돌려세우려는 예수님의 노력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구약 성경을 근거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적대적인 분위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십니다. ‘나를 믿지 말려니와’ 또는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란 표현들은 그의 안타까운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거든’ 그 일만은 믿어달라는 부탁은 그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움으로 가득차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매우 적대시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있음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난과 모욕을 퍼붓는 상대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감정이 격해질 뿐 아니라 억울한 심정이 가득해지면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의 심정에 묻어있는 진실성이 무엇인지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를 대적해도 예수님은 그들이 깨달아 알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상대방이 진리를 깨달아 변화되기를 원하는 기대 심리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깨달아야 할 내용은 예수님과 이스라엘 하나님과의 친밀성입니다. 그 친밀성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예수님이 주장하셨던 ‘나와 아버지는 하나’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구별된 존재이나 완전히 하나임을 강조한 표현인데,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얼마나 이 진리가 중요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돌로 치려해도 예수님은 이 진리를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 진리를 깨달아 수용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물론 안타까운 예수님의 심정이 유대인들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를 보면 그들의 마음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긍휼의 마음으로 대해도 상대방이 수용하지 않는다면 전혀 효과를 내지 못함을 우리로 보게 합니다. 그렇다면 안타까운 심정을 거두어야 할까요? 영적으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 자세는 이 시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를 적대시하는 세상의 눈총이 아무리 매섭고 독하다해도 그들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이 줄어들면 안됩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누구를 향해서든 이 안타까운 심정을 거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감정이 격해지고 억울한 마음이 휘몰아쳐도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가 갖고 있어야 할 진정한 영적인 힘입니다. 이런 마음만 유지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충분히 감당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