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때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고약한 것입니다. 일관된 주장과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도 계속해서 의심을 받는다면 고구마를 백 개 먹은 기분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비난을 쏟아낸 유대인들이 이번에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어디 한 번 말해봐라’고 억지 주장을 펼칩니다. 예수님은 답답한 심정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이란 변호를 하십니다. 이 변호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일관된 말과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말한 이야기들을 기억한다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행한 일을 편견없이 관찰한다면 그리스도로서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과 행동을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도 믿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태도를 갖고 있는 이상 그들은 예수의 말과 행동을 편견없이 대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설득해봐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자꾸 믿으라고만 하지 말고 정말 믿을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증거를 제시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벽했으며 그의 삶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를 믿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해보라고, 증거를 제시보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을 통해 그들을 설득하고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만 할까요?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란 놀라운 선언입니다.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거나 흠이 될 만한 것이 있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양무리에 속하지 않기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란 진단은 너무도 정확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외형적인 증상일 뿐이고 진짜 문제는 예수님의 양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그들은 어떤 말을 듣고 어떤 증거를 목격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백 약이 무효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양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해결될 때에 어떤 약이든 효과를 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어떤 약이든 먹고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어질 때 우리는 그의 양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고 인격이 불완전해도 그의 양이란 점만 확실하다면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 성장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의 양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도 소용이 없던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로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부족한 지식이라도 소중히 활용될 수 있으며 모난 성품을 갖고 있어도 좋은 인격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의 양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따르는데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지만 그의 양이라면 어떤 작은 것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이어야만 그분의 말씀과 삶이 제대로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로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를 닮아갈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