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하나님만을 유일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란 사람이 설교를 통해 자꾸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도록 가르치자 유대 사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예수를 정상이 아닌 미친 사람으로 여겼지만 그가 계속해서 성전에 나타나 같은 메시지를 전하자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전절인 유대인 명절에 솔로몬 행각에 나타난 예수를 발견한 그들은 평소 갖고 있던 불편함을 드러냅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이 질문 안에 그들의 오래된 상한 감정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언제까지 우리를 헷갈리게 할 것이냐’는 말은 여전히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예수의 설교를 들었던 그들이지만 여전히 그의 말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의 설교를 사람의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는 나쁜 이야기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더 기가막힌 것은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 하소서”란 그들의 공격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모든 이들이 알아듣게 말해달라는 뉘앙스가 아닙니다. ‘당신은 절대 그리스도일리가 없다’는 그들의 전제를 드러낸 것뿐입니다. ‘밝히 말씀해 달라’는 요청은 그리스도도 아니면서 이상한 설교로 사람 마음을 현혹시킨다고 예수를 비난한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기에 밝히 말해줄 수가 없을 것이란 유대인들의 시각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에게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여러 사건과 설교를 통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평이한 말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으나 그들은 ‘미혹케 하는 말’ 수준 정도로 평가절하했습니다. 아무리 쉽게 설교해도 어려워서 못알아 듣겠다고 해버리는 것입니다. 어찌 이렇게 고집이 셀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쳤지만 알아듣지 않겠다는 그들의 고집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예수의 말을 ‘마음을 의혹케 하는’ 가짜 뉴스 정도로 평가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에 시간이 약이란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이해하게 될 것이란 생각은 너무도 순진한 것입니다. 지금은 알아듣지 못해도 시간이 흐르면 깨우칠 것이란 기대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영적인 측면에서는 잘 맞지 않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바로 이 순간이 결단의 시간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그의 말씀을 거절하면 계속 그 상태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고집이 쇠줄보다 더 질기다고 하듯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거부 반응 또한 의외로 오래가고 강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선포되는 순간마다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은 결단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한다고 여긴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고집이 너무 강해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가르침을 쉽고 평이하게 전달해도 마음으로 받아 들이지 않기에 소용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오랜 시간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들었음에도 고집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렸듯이 지금의 우리들도 혹시 그렇게 하지 않나 하는 자기 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때입니다. 그냥 무심히 지나치면 안됩니다. 마치 부모의 잔소리를 듣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겠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이같은 노력을 할 때에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깨달음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은 우리로 신앙 생활의 즐거움을 알게 해줍니다. 이런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 우리 삶에 진하게 나타난다면 변화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