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익숙한 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운전을 할 때 항상 다니던 길로만 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낯설고 모르는 길은 가급적 가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길을 가는 것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익숙한 것이 편하고 안전하기에 그것을 선호합니다. 사람도 익히 알던 사람과 만날 때 편안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17절에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란 말씀으로 오직 예수님만이 가실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길, 그리고 그 목숨을 다시 얻는 길입니다. 이것은 세상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입니다. 예수님이 최초로 걸어가신 길이며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하신 위대한 여정입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은 어찌보면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당시에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린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목숨을 버리시려는 예수님의 결단은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유일한 일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을 다시 얻는 일 또한 예수님만이 해낼 수 있습니다. 다시 얻는 일이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 부활 또한 예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땅에 오셔서 목숨을 내놓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일을 해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활은 귀한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길을 친히 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할 정도로 이 일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완벽히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 속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수많은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만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신 것처럼 순전히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리는 길을 가셨습니다. 억울하고 비참하고 통곡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죽음이기에 스스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또한 그 길의 끝에는 다시 살아나는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 길 또한 혼자 성취하셨습니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신 예수님의 위대함이 가장 빛나는 곳이 그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길목에 들어서기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음의 길을 걷고 나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부활의 몸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듯이 우리 또한 주님과 함께 몸의 부활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만이 걸어가셨던 길에 우리가 동참할 수가 있다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 땅에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을 누구나 갖고 있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 또한 생길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비참해지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 때문에 당당히 맞설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는 수많은 위기들 가운데 가장 두려운 일이 죽음일지라도 부활의 소망으로 능히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