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0장16절 “수용하려는 마음” 2021년 3월 31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둘의 친밀함이 새로운 사람의 유입으로 깨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인간 관계가 단순한 것 같지만 감정으로 아주 복잡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라고 하시면서 새로운 양들이 유입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여기서 양들이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새롭게 예수님을 따를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은 서로에게 익숙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들어오는 조건이 무엇인가요? ‘내가 인도할 것’이란 말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사람들을 들여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새로운 사람을 들여 보내실 때 기존의 사람들과 적어도 상의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이런 사람을 너희 무리 속에 들이려고 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라고 의견을 물어봐야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들이겠다고 하십니다. 기존의 사람들과 어떤 협상도 하지 않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기존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을 돌려세우고 계십니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에서 우리가 확인할 것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합류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셔서 예수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사람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 또한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미리 들어온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고 새로운 이들을 수용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런 수용적인 마음은 갑자기 생기거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철저히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질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할 터이니”란 말씀을 깊이 헤아릴 때 우리 안에 생길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됨을 깊이 인지할 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들어온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새로운 이들을 수용하는 마음이 더욱 넓어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사람들을 들여보내시는데, 기존의 사람들이 뱉어낸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이 들고 서로 깊이 신뢰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너무도 귀한 일이지만 오히려 새로운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게 한다면 너무도 가슴 아픈 상처로 남게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수용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능력을 포기한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한 무리에 속하게 하신 의도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의 인도를 받고 그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에 속한 모든 이들은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은 새로운 사람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느냐로 검증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도하심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를 찾을 때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포용하려는 모습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