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마음의 병은 현대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라고 합니다. 많은 연예인들이 마음의 병을 앓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들이 자주 뉴스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 중에도 마음 속 깊숙히 찾아온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닐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을 찾지만 그럴 여유를 갖고 있는 이들이 주변에 많지 않은 현실에서 그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아프면 신호를 보내듯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 또한 아프다는 신호를 주변에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신호를 알아채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마음의 건강을 찾는 이들이 많아질 것은 자명합니다. 이처럼 남을 돌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면서 공감해줄 수 있는 돌봄은 더욱 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은 이 어려운 일을 해내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란 말씀에 얼마나 우리를 깊이 아시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내 양을 안다’는 말은 단순히 객관적인 정보를 갖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아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양의 모든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따르는 이들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보여주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돌봄은 고용된 목자들과 비교할 때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고용된 목자들은 삯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어느 선까지만 양을 돌봅니다.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 같으면 그 자리를 피해 버리는 일은 너무도 쉽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이리떼가 오는 것을 볼 때에 삯군은 양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13절처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이며 그는 양을 돌보는 대신에 자신을 돌보기에 급급합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유는 그분의 말씀처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양의 모든 것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신 것은 그냥 해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완벽히 양을 돌보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돌봄의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줍니다. 양의 모든 것을 아시고 돌보시는 우리 주님의 약속은 그냥 공수표에 불과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에 비교하신 것처럼 그의 돌봄은 완벽 그 자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의 손길은 실제적이며 그 혜택을 누리는 이들은 평생에 걸쳐 그 돌봄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을 피운다고 우리를 쉽게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양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선한 목자인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의 병까지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고통까지도 헤아리시는 예수님의 넓은 품 안으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누구도 할 수 없는 돌봄의 깊이를 예수님은 해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주저함 없이 예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려 할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풍성하시기에 우리는 마음껏 그의 돌봄을 받으며 살 수가 있습니다. ‘나를 아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를 알아가는 것은 우리를 돌보시는 그의 따스함을 깊이 누린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병은 보이지 않게 찾아오지만 그것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돌보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담대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담대함이 우리로 더욱 더 예수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