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어떤 일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는 사람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게의 주인과 종업원의 마음 자세는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양을 대하는 목자의 마음 자세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목자와 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목자를 비교하면서 예수님은 이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을 이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목자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가 있습니다. 어느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을까요? 이리떼에게 잡아먹힌 양들을 포기하고 나머지 양들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목자가 더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과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목자가 자신의 목숨을 내걸다니 이것은 너무도 이치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양을 이리에게 빼앗기는 현장에서 목자는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현실을 잘 아심에도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선언하십니다. 양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목자라 할 수 없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양을 지키지 않고 도망치는 목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이 내용은 이름만 목자일 뿐 실제로는 고용된 일꾼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지적입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라는 말은 아무리 목자라고 스스로 주장해도 목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의미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로서 얼마든지 삯꾼의 마음 자세로 일할 수가 있습니다. 양을 통해 이익을 얻어야 하기에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얼마든지 양을 포기하게 됩니다. ‘양도 제 양이 아니라’는 말은 양을 이용만 하려는 목자의 비양심적인 태도를 지적한 것입니다.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양을 치는 그릇된 마음 자세는 매우 위험합니다. 이런 자세로 양을 친다면 항상 양들은 위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것입니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목자가 없기에 양들은 언제든지 비극적인 처지에 놓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존재하기에 어떤 위험 앞에서도 양들을 지키려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걸어야 할 상황이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마음 자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강력히 지지하면서 본인 자신이 이렇게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란 선언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양들을 보호할 것인지를 세상 앞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지키기 위해 이리와 싸울 것이며 완전한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실 것임을 미리 알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당시 어떤 목자도 양 한마리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기에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어떤 위험에도 불구하고 양을 지키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기르시는 양무리에 우리가 속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의 양이라면 이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키는 목자를 만났으니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를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을 위해 목숨을 내건 목자의 품 안에 안긴 양의 평온한 얼굴을 상상해 본다면 예수님의 품 안에 들어간 우리가 얼마나 기쁨과 행복이 넘칠 수 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라면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오늘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