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장 43절-51절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9/17/2020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 속을 알기 어렵다는 말에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의 속마음도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평가는 단지 외적인 모습만 보고 내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얻은 것도 아닙니다. 빌립이 미리 정보를 제공해서 이렇게 평가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는 말씀을 통해 그를 눈여겨본 시기를 밝히셨는데, 이것만 가지고 어떻게 그의 속마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는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본문은 침묵하지만, 무슨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면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평가는 무색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었던 나다나엘을 본 것만으로도 그의 속마음을 아신 것에 놀란 나머지 나다나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아마도 하나님이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구약 성경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알아준 것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속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는 나름대로 깨끗한 삶을 산 것에 대한 자긍심을 충족시켜준 예수님께 감격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칭찬은 커녕 비난과 악한 소문으로 나다나엘을 괴롭힐 때 예수님이 오셔서 위로해주신 것에 마음의 문을 연 것이 아닙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평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되묻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예수님이 해주신 것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 것일까요? 평소 듣고 싶었던 칭찬을 예수님이 해주셔서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물은 것일까요? 아마도 당시 어떤 유대교 선생들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평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란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빌립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말하자 평소의 생각이 여과없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출신이라면 그 누구도 별 볼일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나다나엘이 지금 예수님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란 말은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오던 모든 확신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기에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던 그릇된 확신이 근본적으로 깨지는 순간입니다. 그의 심적인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로 드러낸 것입니다.
심적으로 지진이 일어난 상태에서 단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던 자신을 본 것만으로 자신을 알아본 예수님에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나사렛 출신인 것만으로 평가절하했던 예수님을 이제는 하나님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이제는 예수님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도 얼마든지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그릇된 생각에 함몰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너져야 우리도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적인 변화가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만을 위한 삶을 건설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이루어기를 소망하면서 묵묵히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