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려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시 물어보고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그릇된 이해가 발생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에 맞추어서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때에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하지만 전달하는 이의 이해가 섞여 있기에 그 의미가 다르게 전해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어떻게 잘못 전달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답하셨습니다. 과연 이 말을 베드로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오늘 본문이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란 본문의 언급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왜곡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사실 관계를 바르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는 대목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단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인용했을 뿐입니다. 즉, ‘그가 죽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가 없음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원래의 말씀과 제자들이 이해했던 말을 비교해놓은 것은 이 둘 사이가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이것을 풀고자 하는 노력을 많은 학자들이 해왔습니다. 지금도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질문할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얼마든지 그릇된 방식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제자들 마저도 이렇게 잘못된 해석을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경각심을 갖고 자신의 이해가 무조건 맞다는 자만심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성경을 왜곡시킨 이들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전3:16)고 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 자신도 과거에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기에 이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를 수 있다는 이 경고의 메시지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교묘하게 해석해서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가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가 위대한 학자이든 평범한 신앙인이든 성경을 동일하게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읽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에 근거해서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더 바른 해석을 한 이들의 글을 읽고 도움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신앙인으로서 그저 성경만을 읽을지라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음을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자신의 해석을 먼저 내세우기보다 말씀 자체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말씀에 대한 좀 더 바른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