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동안 어떤 제자들보다 열정적으로 그를 따랐던 베드로는 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채 물고기 잡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이대로 놓아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이신 그는 특별히 베드로와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질문을 던지신 다음에 베드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은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표현은 그가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을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첫 부르심을 생각나게 하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서 그를 부르신 것이기에 더 특별합니다. 그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부르심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는 해설을 덧붙이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두 번째 부르심을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어떠한 죽음까지도 감수하게 되는지와 연결하고 있기에 이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더욱 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이 될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가 베드로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기록했다면 이것은 이미 증명된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는 A.D.64년 정도에 네로 황제 치하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본문에서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특별히 해설해놓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 장면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베드로가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과거에 베드로가 어떻게 살았느냐보다는 이제부터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초첨을 맞추면서 이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신앙적인 자극을 받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베드로만이 하나님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예외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수할 것이란 언급은 모든 신앙인에게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이 엄숙한 장면은 이를 읽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강력한 흡인력이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일까요? 죽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면 이것이 가볍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음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기에 너무도 엄중한 요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한 것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이며 무게입니다. 이를 할 수 있도록 성령의 내주하심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능히 이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신자로서의 삶인 것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