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을 요한복음서는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제인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의 전도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제자로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요한복음서는 베드로를 거의 언급하지 않다가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할 때에 그가 했던 고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이후에도 베드로는 또 한참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요13:9)란 요구를 하면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요13:36)라고 했을 때에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라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그의 말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뒤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그는 무덤으로 단숨에 달려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부 생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목격했지만 그는 자기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라면서 적절하게 은유적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베드로가 걸어왔던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제자가 되었지만 베드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 수가 없음을 예수님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는 베드로가 과거처럼 살 수가 없음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요한복음서는 그의 죽음과 연결시켰지만 좀 더 폭넓게 본다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이후부터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 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 거대한 그림을 그려주신 것입니다. 이후 베드로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삶이 정말 달라졌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자기 길을 자기 마음대로 가는 자유의 삶이 아니라 성령이 이끄시는대로 걸어가는 그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으며 고넬료 가정을 방문할 때에도 온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팔을 벌리고 남이 이끄는대로 걸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순종의 길이 무엇인지를 베드로에게 은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순종은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삶이 아닙니다. 순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의지하며 걸어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우리가 ‘원하는 곳’을 다니는 삶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용기를 요구합니다. 이런 순종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지만 우리가 그분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면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승리의 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자유가 없는 삶이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원하는 길이 얼마나 귀하고 멋진 것인지를 아는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처럼 예수님께 손을 내밀어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는 삶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