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14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2022년 1월 5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부활의 몸으로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을 요한복음서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세 번째’란 숫자를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 표기는 물고기 잡은 숫자를 ‘153’이라고 기록한 것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기록의 정확성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이는 기록의 신뢰성을 중요시 여기는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들어간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란 표현은 다른 두 번의 나타냄에는 없었던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의 확실성을 최고 수준으로 강조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후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요소를 원천 차단한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도둑질해갔다는 음모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복음서 내용을 보면 실제로 그런 음모설이 유대 사회에 퍼져나갔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 것은 모든 헛된 소문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것이 확실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 또한 확실했습니다.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부활의 증인들이 지어냈다거나 거짓 증언을 하고 있다고 음해하는 잘못된 주장들을 반박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임을 또한 놓쳐서는 안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에 대해 요한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 것은 자기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나타내셨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의 증언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부정되면 교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간과하는 어떤 주장도 용납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부활의 몸을 나타내셨다는 사실 하나로 교회는 부활을 세상에 증언해야 하기에 이를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란 저자의 서술을 단순한 기록 정도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록했다는 정도로 이 서술을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이 진술은 교회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는 생명과 같이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요한복음서에 나온 이 진술 하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정도로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단어 하나 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어서 읽어야 할 정도로 귀한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지난 이 천년 동안 세상에 알렸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세상은 여전히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한낱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부활을 치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적인 증명도 없이 몇 사람의 증언만으로 부활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미개한 짓인 것처럼 호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요한복음서가 기록한 부활의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향해 당당히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씩이나 부활의 몸을 자기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의 확실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세상의 목소리에 우리는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고 모든 시대 모든 교회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세상에 증언하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