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장 23절 “교회의 영적인 책임” 2021년 12월 20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증언한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신 동시에 죄를 제거하시는 분이심을 말한 것입니다. 사역하시는 동안 죄를 용서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제거하시는 일을 해내셨습니다. 죽음은 죄의 무기인데 이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완전히 궤멸시켜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죽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성을 갖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죽음으로 죄를 무력화시키신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이것을 완성하셨습니다. 더 이상 죽음이 예수님에게 힘을 쓰지 못하게 해버리신 것입니다. 이 효력이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허락될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체험한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축복하셨던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죄 용서를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아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과연 이들이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이 이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갖는 영적 책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내용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제자들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처럼 읽힐 수가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죄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는 이들에게만 허락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란 이 약속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평강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2:38)고 베드로가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란 말씀이 갖는 뜻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를 제자들이 갖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으라고 세상을 향해 외칠 때에 실제로 사람들이 죄 용서를 받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장면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게 되는 죄 용서의 메시지를 전할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메시지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져야 할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죄 사하는 영적 권위를 갖는 것처럼 본문이 왜곡되어 사용되기도 했지만 사실은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영적인 책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먼저 알고 있는 이들로서 세상에 이를 증거하는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됨을 본문이 보여준 것입니다. 물론 이를 세상이 거부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용서를 무시하거나 외면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이를 핑계로 세상과 벽을 쌓고 지낸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세상이 거부한다고 해서 교회가 세상을 거부하면 안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거부하는 것을 예수님은 허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박해하고 잔멸하려고 해도 예수 안에 있는 죄 용서의 복음을 목숨을 걸고 전해야 할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아 사방으로 흩어졌는데도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8: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이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가 얼마나 헌신하고 수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명을 오늘날의 교회가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는 축복의 현장에 교회가 항상 있어야 함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