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지금은 정반대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하는 모습을 본문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슬픔과 절망에 휩싸인 감정으로 예수의 시체를 어떻게 찾을지를 놓고 깊이 고민했던 그녀가 이제는 기쁨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외쳤습니다. 이 메시지는 강력했습니다. 물론 학자들은 당시 여인의 증언은 신빙성을 크게 얻지 못했었기에 이 메시지 또한 제자들에게 그리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증언을 하는 마리아의 마음은 남달랐습니다. 그녀가 전하는 ‘내가 주를 보았다’는 증언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아무리 당시 사회가 여인의 증언을 가볍게 여겼다해도 실제 눈으로 주를 보았던 그녀의 증언 자체를 약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증언을 어떻게 생각하든 ‘주를 보았다’는 사실로 인해 마음에 행복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채워지는 놀라운 영적인 즐거움을 충만히 누렸을 것입니다.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전했을 때에는 발걸음이 천근처럼 무거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주를 보았다’는 부활의 메시지를 전할 때에는 너무도 행복해서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채 제자들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본 부활의 예수님을 과연 제자들이 믿어줄까란 걱정은 아예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어주지 않고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면 어쩌지란 걱정 또한 조금도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서 얻게된 행복이 그만큼 그녀의 마음을 가득채웠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를 보았다’는 경험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은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앞 절이 말해주듯이,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곧 승천하실 것을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이 또한 제자들이 믿어줄 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 메시지였습니다. 부활한 것도 믿기 힘든데 승천하실 것이란 메시지는 더욱 믿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런 걱정으로 인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이 너무도 확실했기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란 부분은 그리 중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그의 메시지를 들었던 것을 충실히 말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며 이 땅에서 부활과 승천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신앙인들의 마음 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부활과 승천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마리아의 증언은 교회의 자랑이며 확신입니다. 그녀가 보았고 들었던 부활 이야기는 우리의 영적인 자산입니다. 그것을 과연 우리는 의심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에 자랑스럽게 전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란 생각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부활과 승천 이야기를 꾸며낸 허무맹랑한 신화로 치부하는 것에 주눅들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기쁜 소식을 전하는 행복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주를 보았고 주께 들었던 마리아의 모습을 성경에 기록해 둔 것은 우리로 그것을 세상에 이야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확신하고 있다면 이 기쁜 소식을 즐거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