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등장으로 안전하게 그의 시체가 보존되었습니다. 장례의 마지막 절차인 무덤에 묻히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볼 때에 요한복음서의 기록은 특색이 있습니다. 무덤에 묻히는 과정을 좀 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단락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를 일컫는 말)에 비해 묘사가 매우 상세합니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을 언급한 것과 ‘동산’이란 위치는 요한복음서만의 묘사입니다. 또한 ‘새 무덤’을 묘사하면서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이란 수식어를 붙여서 강조한 것도 특색입니다. 당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중죄인을 일반인들이 묻히는 무덤에 두는 일을 유대인들은 싫어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묻은 것을 유대 지도자들은 만족했을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아우성을 쳤던 유대 지도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예수를 위한 새로운 무덤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작동한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일반 범죄자들이 묻히는 곳에 얼마든지 예수의 시체를 둘 수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또한 안식일이 곧 다가오는 시간에 예수의 시체를 이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아무 곳에나 묻을 수도 있었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손길로 해결이 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그 안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무덤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에 두니라”는 본문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상황이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이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새 무덤’의 주인은 아리마대 요셉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서는 무덤의 소유권이 누구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준비한 것이 아님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무덤이 기다렸다는듯이 그 곳에 하나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본문 저자는 하나님의 내밀한 섭리를 강하게 드러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성경의 방식이 다양함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행동하시는 장면을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개입을 전혀 언급함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도록 상황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목숨이 끊긴 상태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고 모든 것을 누군가의 손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 환경을 다 조성하셔서 예수의 시체를 안전하게 새로운 무덤에 묻히게 하셨음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삶에도 그분의 섭리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정황을 보면서 느낄 수 있도록 역사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관망하시면서 적절하게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섭리가 멈춘 것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쪽으로만 맞추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우연의 일치로만 보는 것도 신앙적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한 가운데서는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뒤돌아보면서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삶에 남기신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너무도 귀한 신앙적 유산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