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 4절-7절 “누가 더 나쁜가?” 2021년 11월 9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온갖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규정한 그는 모든 유대인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귀족이 입는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겉으로는 왕의 행색이지만 죄수 신분으로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 앞에 예수를 세운 후에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면서 책임 회피와 책임 전가를 시도했습니다.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면 고발인들이 뭐라고 하든 그를 풀어주는 것이 맞는데 빌라도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에게는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그의 비열한 정치술과 권력에 대한 더러운 욕망을 동시에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 사회를 지배하는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예수 고발 사건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술수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믿었거나 그를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고 말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예수를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시키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치장하면서도 가시관과 허접한 귀족의 옷을 입혀 모든 사람 앞에 세워놓고 조롱한 것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의 비열한 욕망과 함께 도드라진 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광기어린 신념입니다. 그들은 가시관과 자색 옷을 입고 나타난 예수를 보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란 말을 연거푸 외쳐댔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면서 십자가에 처형해야 할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신성 모독죄를 지은 중죄인으로서 마땅히 십자가 처형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음에도 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근거로 예수를 죽이려고만 했습니다. 마치 귀를 막은채 자신들의 주장만을 외쳐대는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무죄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만을 놓고 본다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훨씬 더 나쁜 마음을 먹고 있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광기에 사로잡힌 대중들로부터 예수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모습만 다를 뿐 예수를 대하는 태도에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둘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되는 죄수 또는 스스로 왕이라 주장하는 미치광이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둘 중 누가 더 나쁜가에 있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둘 다 예수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고 실제 유대인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이런 수모를 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분이십니다. 하지만 당시 권력자들의 합작에 의해 죄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신 분이 십자가라는 극형에 처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예수님은 어떤 저항이나 항의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사리 분별을 전혀 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으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진짜 모습인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에 대해 언제나 이렇게 적대적인 것을 교회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에 대한 이미지를 잘 포장하면 세상이 좋아할 것이라 오판해서는 안됩니다. 예수의 왕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분이심을 세상은 여전히 혐오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하라면서 그에게 적대적이었듯이 지금도 세상은 변함없이 예수님에게 적대적입니다. 예수에 대한 세상의 태도를 보면서 누가 더 나쁜가란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예수의 왕되심과 세상의 구주되심을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