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 39절-40절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 2021년 11월 30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허락받은 아리마대 요셉 이야기는 사복음서 전체가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의 등장은 요한복음서만이 다루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란 언급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인물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주요 인물로 니고데모가 등장한 것을 비롯해서 7장50절에서는 예수님을 옹호하는 인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사람을 세 번에 걸쳐 언급할 정도로 비중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았을 때에는 그의 호기심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7장50절에서는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예수님을 찾아와 그의 시체를 소중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에서 그의 마음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등장한 것을 볼 때에 그의 예수님을 향한 신앙심이 확실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에는 밤에 몰래 찾아왔지만 이제는 다른 이들이 다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치룬 것은 그의 변화가 얼마나 확실한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백 리트라(약30킬로그램)나 되는 향품을 가져와 예수님을 위해 사용한 것과 유대인 장례법을 따라 세마포로 예수의 시체를 감싼 것을 볼 때에 그의 신앙심이 매우 돈독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그의 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모습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고위층에 속한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니모데모에게는 예수님이 존귀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중죄인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의 시체를 돌보는 그의 모습은 이런 아쉬움까지도 느끼지 않게 할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로마 군인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유대인들에 의해 철저히 버려진 예수님의 시체를 이렇게 존귀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그의 신앙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물론 니고데모가 부활을 믿고 이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사건 뒤로 그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장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 그였기에 이 뒤로도 예수님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정도로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는 그의 모습은 신앙적으로 큰 교훈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의 행위를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르게 행동합니다. 니고데모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긴 것처럼 우리의 태도 또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이 진실하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이 크게 변화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모습을 보면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란 고백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라 삶에서 이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과연 예수님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완벽한 삶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갖고 주님을 높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