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의 시체를 치워달라는 요청을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했습니다. 당시 로마 법에 의하면 사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그의 친족들이 가져갈 수 있게 했지만 예수님의 경우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처형될 때에는 시체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죽음 이후에 시체가 매우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전적으로 총독인 빌라도의 결정에 달려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합니다. 그의 허락을 받고나서 요셉은 시체를 가져갑니다. 그런데 본문은 요셉이 예수의 제자란 사실을 언급하면서 다른 복음서와 달리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란 설명을 덧붙인 것입니다. 의도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인상을 풍깁니다. 예수의 제자였지만 그동안 그 사실을 숨겨왔던 요셉인 점을 강조한 것은 그의 달라진 모습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확실히 달라졌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의 시체를 가족들이 가져갈 수 없었고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앞장선 것은 그의 신앙에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이 두려워 예수의 제자됨을 숨겨왔던 그가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었다는 점이 놀라울 뿐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동안 유대인들은 공포 정치를 펼쳤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요9:22)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출교란 유대 사회에서 축출당하는 것으로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처벌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이들이 이를 무서워해서 공개적으로 예수의 제자됨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요12:42)는 장면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출교를 당하는 일이 어느 정도로 두려운 일인지를 당시 사람들은 잘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내면 출교를 당하게 되기에 이를 숨겼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같은 이유로 예수의 제자됨을 숨겼던 것입니다. 출교라는 엄청난 압박에 짓눌려 신앙이 질식당할 정도였습니다. 출교까지 감내하면서 예수의 제자됨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요셉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출교도 두렵지 않을 정도로 담대해졌습니다.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이 변화에 본문이 주목하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하지만 이를 드러내는 순간 상당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압박을 가합니다. 과연 이런 환경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쉬울까요? 아리마대 요셉처럼 두려움으로 인해 이를 숨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우리도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위축된 신앙 생활을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의연하게 예수의 제자됨을 밝히고 모든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갑자기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인 이유를 본문이 설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다양한 이유로 사람을 변화시키실 수 있음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함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론 위축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임을 숨길 수 있지만 주님은 이런 우리를 변화시켜 당당히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항상 품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임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