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 31절-34절 “죽음이 확실해야 하는 이유” 2021년 11월 24일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우리는 요한복음서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부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만큼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만약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면 그의 부활도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부활에 죽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도 사역하시는 동안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자신이 육체적으로 죽을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는 묘사처럼 육체적으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미 죽은 예수님을 놓고서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는 요구를 빌라도에게 했습니다. 죽지 않을 수 있었기에 다리를 꺾어서라도 빨리 죽게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오랜 시간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런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렇게 서둘렀던 것은 예수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선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안식일이 겹치는 가장 큰 날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그들은 빨리 그 상황을 정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는 안식일과 십자가 죽음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들이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군인들을 시켜 십자가에서 시체를 치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군인들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있던 세 사람의 죽음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양 편의 죄수들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고서 그들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즉시 그들은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차례가 되어 그의 다리를 꺾으려 했지만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그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어느 정도로 깊이 찔렀는지 알 수 없지만 피와 물이 나왔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확인사살을 하듯이 잔인하게 시체를 훼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확실하냐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보여주고 있기에 이 점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영혼이 떠나가셨다는 설명과 이미 죽은 것을 군인들이 보았다는 점, 그리고 창으로 그의 옆구를 찌른 행위를 종합해보면 요한복음서 저자가 예수의 죽음이 얼마나 확실했느냐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너무도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죽음이 확실해야 부활도 더 확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불확실해지면 부활도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지어낸 것이 절대 아님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이 사실에 무척 강조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행13:28)란 역사적인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분의 죽음이 얼마나 확실했는지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훼손하려는 어떤 주장도 우리는 멀리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세상 죄를 지시고 육체적으로 죽으신 예수님을 교회는 조금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향해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우리는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강력히 외쳐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세상에 구원을 알리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 이 사실은 증명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교회는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확실함을 우리는 누구 앞에서든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