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한 장의 사진이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렬하게 인상을 남길 수가 있습니다. 비극적인 삶의 현장을 담은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사람들은 깊은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그 어떤 말로 묘사한 것보다 더 깊은 이미지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마치 한 장의 사진에 담듯이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장면임에도 어떤 감정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사진으로 찍듯이 현장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슬픔과 비통함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절제와 압축된 언어로 묘사하면서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인 해골이라는 곳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과 비통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아무 죄도 없다는 빌라도의 선언을 알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입니다. 예수님 대신 분노를 느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그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군인들에 이끌리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당시에 십자가 처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 하나로도 모든 것을 느낄 수가 있을 정도로 강렬한 장면입니다. 말로 십자가 처형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매우 단순하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라고 적고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처형을 예수님만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라고 말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은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라는 말로 누구에게 집중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들이라면 예외없이 느껴야 되는 공포가 있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예수님이 갖고 있음을 놓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품고 있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른 두 사람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에게만 모든 시선을 고정시켰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비참함과 억울함에 우리가 공감할 수도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이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세례 요한의 말을 통해 이 점을 강조했는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 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다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하셨던 위대한 일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못 박혔던 두 사람의 십자가에는 이런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을 믿었기에 이런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 가장 극악한 죄인에게 주어지는 형벌인 십자가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지신 것은 어떤 죄인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를 받고 구원받게 하기 위함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에 지금도 죄인에게 구원이 주어질 수가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