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원한 적은 없다는 좋은 의미도 있지만 사람의 비정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활동할 당시 유대 사회의 가장 큰 적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로마가 황제 숭배를 강요했을 뿐 아니라 유대를 식민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꺾고 자유를 얻을 날을 학수고대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그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란 질문을 던졌던 것을 볼 때에 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공통 관심사는 하나님이 언제쯤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 제국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느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너무도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 황제를 거부했던 당시 정서와는 정반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왕으로 로마 황제를 인정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것인데, 당시 황제의 이름은 ‘티베리우스’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 앞에서 가이사만이 자신들의 왕이라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놓아주려는 빌라도의 노력을 눈치챈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그를 압박하는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는 말은 거의 협박에 가까울만큼 위협적이었습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을 왕으로 인정하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황제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서 그들은 로마 황제를 왕으로 인정해버린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 처형에 동의하지 않자 그들 스스로 가이사만이 자신들의 왕이라면서 그를 압박했습니다. 이 지점이 인간의 비열함이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악과 손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음을 증명해준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습니다. 그렇게도 비난했던 사람과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는다거나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던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갖고 있는 주체할 수 없는 사악한 욕망 때문입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기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들에게 사악한 욕망이 생기자 선악과가 세상에서 가장 탐나는 열매로 보였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명령은 그들의 마음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오직 하나의 욕망만이 자리잡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질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욕망뿐이었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 하나님 신앙과 정반대되는 일을 서슴없이 저지른 유대인들의 욕망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고 가르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악한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면 선악의 경계선이 희미해질 뿐만 아니라 악과 손을 잡는 일이 쉬워집니다. 악과 손을 잡아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이것을 끊어내는 일이 너무도 힘들기에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강한 어조까지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끌려가지 않도록 경계심을 느슨하게 하면 안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악과 손을 잡으면 안됨에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자신의 욕망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고 판단되면 어떻게든 그것에 저항해야 합니다. 때론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를 수가 있지만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한 권면처럼 우리도 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