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존경을 받던 사람이 한순간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쏟아지는 온갖 야유와 멸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조롱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 맞는지를 확인하지 않은채 대중 심리에 휩쓸려 비난을 퍼붓는 일이 생깁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완전히 파괴될 정도로 모욕과 멸시는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낙인찍었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해도 핑계와 변명만 하는 파렴치한으로 몰아갈 뿐입니다. 이런 극한의 수모를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당한 수모와 모욕이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를 행동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했습니다. 단순히 몇 대만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때렸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채찍에 날카로운 것을 덧입혀서 때렸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채찍을 맞음으로 느꼈을 고통이 어머어마했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다고 했던 빌라도가 이렇게 가혹한 처벌을 가한 것은 예수로 더 큰 모욕을 느끼게 할 목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상상하면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군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스스로 밝힌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왕관과 왕의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로 만든 관에다 겉모양만 왕의 옷처럼 보이는 낡은 것으로 입혔습니다. 이런 행위가 조롱과 멸시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연이어 나옵니다. 예수의 뺨을 때리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는 상대의 인격을 짓밟는 비열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도 인정했듯이 예수님은 어떤 잘못이나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합당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요? 유대인의 왕이란 신분 때문에 당한 것이었을까요?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단순히 시대적인 불운을 타고났기 때문이었을까요? 모두 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의 공격을 최대치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죄가 예수님의 인격을 말살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그에게 쏟아부었던 것입니다. 죄가 없던 예수님이기에 이런 모욕과 멸시를 당하게 되면 그 인격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렇게 공격했던 것입니다. 죄의 잔인함이 민낯을 드러낸 순간을 우리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이런 대접을 받고서도 사람이 망가지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를 예수님에게서 보고 싶어한 죄의 비열함이 드러난 것입니다. 과연 어느 누가 이런 수치와 모멸감 앞에서 냉정함을 유지할 수가 있을까요? 빌라도와 군인들은 죄의 하수인이 되어 예수님의 인격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이 욱하는 마음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그들을 제압했다면 죄에게 지고 마는 것입니다. 죄가 이것을 노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와 군인들을 힘으로 제압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온갖 치욕과 멸시를 온 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억울함과 분노가 치솟아 이성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이 땅에서 이루셔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억울함과 모욕, 수치와 멸시를 감당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고통을 겪었고 그것을 이겨낸 모습들이 나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일들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이로서 묵묵히 모든 고난을 감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왜 이런 대접까지 받으면서 주의 길을 가야 하느냐란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사명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